돌로미테 여행기 #5. 로카텔리 산장의 별 헤는 밤 Ⅲ

2015. 2. 16. 20:01알프스 Alps/돌로미테 Dolomite

2014년 7월 5일 토요일
오늘의 일정: 코르티나 담페초 > 드라이친넨 호텔 > 로카텔리 산장

  via ferrata 한국어로 굳이 번역하면 '철의 길'이다. 1차 세계 대전 당시, 군부대가 움직이기 위해 돌로미테 산악 지형에 길을 텄다. 바위에 철심을 박고, 절벽에 사다리를 설치하고, 막힌 곳은 굴을 뚫었다. 그 흔적들이 고스란히 아직까지 남아있다. 무언가를 지키기 위해, 혹은 무언가를 빼앗기 위해 만들어진 것들. 애시당초 그들이 만들어졌던 목적 자체는 이제 의미를 잃었다. 사람들은 그곳을 방문하고 그들의 아픈 역사를 기억하는 한편, 단지 취미 생활을 영위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 이곳을 방문한다. 직접 비아 페라타를 가보면 알겠지만 난이도가 상당하다. 암벽을 오르내리는 것은 기본이고, 때로는 철심 하나에만 의지해 절벽을 횡으로 통과하기도 한다. 어느 정도 숙련된 사람이 아니면 엄두조차 내지 못할 정도이다. 지역마다 난이도 차이가 심해 어떤 곳은 정말 위험한 절벽 코스인 반면, 쉬운 길은 그저 능선을 걷는 코스로만 이루어진 곳도 있다(물론 양쪽은 까마득한 낭떠러지. 미끄러지면...).


비아 페라타비아 페라타의 흔한 광경


돌로미테, 비아 페라타비아 페라타, 암벽 구간돌로미테, 비아 페라타위험한 길의 연속



  내가 지금 이렇게 구구절절 비아 페라타가 어쩌니, 위험하다느니 장황하게 늘어 놓는 이유는 단 하나다. 나 같이 모르고 갔다가 낭패 보는 분이 없기를 바라는 마음에 경각심을 주고자 함이다. 산을 다니는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문구가 하나 있다.
  "산에서 절대 자만하지 말아라"
  자만을 넘어 너무 무모했다. 단지 시간을 줄이고자, 한 번도 가본적이 없는 길을. 그것도 난이도가 어떤지 확인도 안하고 무모하게 비아 페라타를 갔다. 무사히 살아 돌아와 이렇게 글을 쓰고 있음에 감사할 따름이다.

  오론조 산장에서 라바레도 산장까지는 경사가 없는 편평한 길이며, 도로가 잘 나있어 누구나 쉽게 갈 수 있다. 일반 자동차도 다닐 수 있으나 출입은 허가된 차량만 가능하다. 길의 오른편으로 비탈진 경사가 저 멀리 오론조 마을까지 이어져 있다. 날씨가 왠만큼 흐린 날이 아니고서는 오론조 마을과 오론조 호수가 한 눈에 들어왔다. 좌측으로는 트레치메 디 라바레도가 우뚝 서 하늘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하지만 모양새는 울퉁불퉁하니 어디가 세 개의 봉우리인지 가늠할 수 없었다. 제대로 된 트레치메 디 라바레도를 보려면 오론조 산장의 반대편, 로카텔리 산장 방향에서 바라봐야 한다.

  라바레도 산장까지 편평한 길로 쭈욱 갈 수도 있었지만 나는 지름길을 택했다. 암벽하는 사람들이 다니기 위해 처음 뚫어놓은 길인데 지금은 지름길처럼 사용되고 있다. 라바레도 산장을 넘어 고개 까지 이어지는 길이다. 이 길은 트레킹 지도에 표시되지 않았으나 사람들이 자주 다니면서 길이 잘 닦여져 몇 지도에는 트레킹 코스로 표시 되고 있었다.


돌로미테의 심장 트레치메 디 라바레도서서히 윤곽을 드러내는 돌로미테의 심장, 트레치메 디 라바레도(Tre Cime di Lavaredo, Dolomite)


  고개에 올라서면 눈에 띄게 바뀌는 풍경이 있다. 바로 로카텔리 산장이 보인다는 것과, 트레치메 디 라바레도의 모습이 윤곽을 잡고 보이기 시작한다는 점이다. 로카텔리 산장과 트레치메 사이로 찌뿌둥하니 구름들이 몰려와 성을 내고 있었다. 해는 이미 주변을 붉게 태우며 저물어 가고 있었고, 로카텔리 산장을 향해 가는 사람은 나 뿐이었다. 솔직히 두근 거렸다. 워낙 이런 위험한 산길 다니는 걸 좋아하는 성격이었다. 초등학교 때 학교와 집 사이에 산이 하나 있었다. 등교하기 위해서는 산을 휘 돌아 30분 가량 걸어가야 했다. 하지만 산을 가로질러 가면 10분이면 갈 수 있었다. 아침마다 기록을 세우기 위해 열심히 산을 뛰어 다녔다. 3년 정도 그 길을 다니다 보니 눈 감고도 갈 수 있을 지경이었다. 수업이 끝나고 할 일이 없으면, 집에 오는 길에 산 구석구석을 누비고 다녔다. 새로운 곳을 발견하고 루트를 개설하는 게 재미있었다. 나름대로 트레이닝 코스도 만들어 놨었다. 가끔씩 친구들과 산에서 총싸움이라도 하게 되면, 나는 곳곳에 내가 만들어 놓은 매복지에 숨어 아이들을 기다렸다가 저격하곤 했다. 하지만 대부분은 내가 있는 곳까지 오지도 않았고 나 혼자 기다리기 일쑤였다.

  비아 페라타의 시작점에 도착하자 굴 입구가 보였고, 그 옆에 의미심장한 마크가 하나 있었다. 군사용 굴이라는 표시였다. 이 곳에서 잠시 망설였다. 가야하나 말아야 하나. 한 5분 정도 서성이며 고민했다. 왼쪽으로 트레치메 디 라바레도의 옆 얼굴이 노랗게 물들어 있었다. 잠시 후에는 내 얼굴이 노랗게 되겠지만.


돌로미테 비아 페라타비아 페라타의 시작점, 굴 입구 돌로미테 비아 페라타'군사용 굴' 표식


돌로미테, 트레치메 디 라바레도해가 지며 점점 붉게 물드는 돌로미테의 모습


돌로미테, 트레치메 디 라바레도해질녘의 트레치메 디 라바레도


  굴 안을 들어가자 안그래도 어둑어둑 할 무렵이라 어두운 굴 안은 암흑 그 자체였다. 랜턴을 켜고 조심스레 걷기 시작했다. 가끔씩 나오는 이정표가 아니었으면 굴 안에서 길 잃을 뻔 했다. 아무 것도 안보이는 상태에서 갈림길이 나오니 상당히 난감했다. 이정표가 잘 되있는 편은 아니었다. 팻말이 있는 곳, 벽에 라카로 칠해 놓은 곳, 방향 표시만 빨간 점으로 찍혀 있는 곳 등 거의 암호문 해독하는 수준으로 길을 찾아야 했다. 곳곳에 외부를 향해 작은 구멍이 뚫려 있어 굴 내부를 비추고 있었다. 그곳을 통해 먼 곳까지 조망이 가능했다. 사이즈는 포 하나가 들어가기에 적당한 정도였다.

 돌로미테, 비아 페라타굴 내부를 따라 이어진 계단 돌로미테, 비아 페라타이 구멍을 통해 무엇을 봤을까 그들은.


돌로미테, 비아 페라타천장이 낮아 허리를 굽히고 다녀야 했다.


  굴을 빠져나와 어느 정도 걷고, 암벽을 오르내리고 정신없이 걸었다. 조금씩 시간에 쫓기고 있었다. 해는 저물어 가고, 온 세상이 황금빛이었다. 슬슬 배도 고프고, 무엇보다 갈증이 났다. 항상 챙기고 다니던, 비상 식량들과 물통, 그리고 내 가방은 지금 내게 없었다. 아까 오론조 산장으로 급하게 뛰어 갈 때, 조금이라도 빨리 가려는 마음에 산장에 놓고 출발했다. 아까 고민하며 망설였던 고개에서 보통 길로 갈 경우 30분이면 로카텔리 산장에 도착한다. 그런데 이미 비아 페라타 시작한지 40분, 아직도 나는 해발 2700m 산 봉우리에서 바위에 박힌 철심을 잡고 목마름에 허덕이고 있었다. 점점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분명히 이쯤 오면, 저쪽에 로카텔리 산장이 보여야 하는데. 야속하게도 앞에 거대한 봉우리가 버티고 있어 시야를 방해했다. 그렇다고 그 봉우리를 오르자니 꽤나 코스가 험해보였다. 설상가상으로 여기는 내가 가지고 있는 지도에 나오지 않는 길이었다. 오로지 아이폰에 미리 다운 받아놓은 이 지역 지도의 GPS를 이용해 내 위치를 가늠 할 뿐이었다. 불안했다. 내 위치가 점점 로카텔리 산장에서 멀어지고 있었다. 이게 아닌데. 아까 갈림길이 생각났다. 왼쪽은 험난한 절벽 코스였고, 오른쪽은 평지길이었다. 어떠한 문구도 설명도 없었다. 돌아가더라도 안전한 길로 가자는 생각에 우측 길을 택했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왼쪽 길이 로카텔리로 가는 유일한 길이었다. 지금 내가 택한 이 길은 우측으로 산을 내려가는 길이었다. 이 길을 따라 계속 가면 로카텔리 산장에서 3시간 거리에 있는 Pian di Cengia 산장에 도착하게 된다. 선택을 해야 할 시간이었다. 로카텔리 산장은 이미 시야에서 보이지 않았고, 저 밑으로 로카텔리 산장으로 가는 길만 아스라히 보일 뿐이었다. 그 길까지 우선 간 다음, 그 길을 따라 로카텔리 산장까지 가야겠다고 마음 먹었다. 그러나, 길이 아닌 곳을 질러 가기에는 너무 위험했다. 얼마 못가 진흙 구덩이와 녹다 만 얼음, 그리고 밑이 보이지 않는 절벽들로 인해 더 이상 전진 할 수 없었다. 내 선택이 잘못된 것임을 깨닫고 미련없이 돌아섰다. 아까 갈림길까지 다시 가기로 마음 먹었다. 거기까지 간 다음, 너무 어두워 가기에 무리라고 판단되면, 처음 시작점까지 돌아갈 예정이었다. 정말 잘못되었다가는 조난 신고 하고서 굴 안에서 밤을 지새워야 할 판이었다.

(위기에 봉착한 순간, 과연 로카텔리 산장까지 무사히 갈 수 있을 것인가. 다음 편에 계속)